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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고 쓰네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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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마고 쓰네히사는 1458년에 태어나 1541년에 사망한 센고쿠 시대의 무장이다. 이즈모의 슈고다이였던 아마고 기요사다의 아들로, 교토에서 인질 생활을 하며 교고쿠 마사쓰네의 이름을 받아 성장했다. 이즈모로 돌아와 아버지로부터 가독을 상속받은 후, 막부와 슈고의 권위에 저항하며 세력을 확장했다. 오우치 가문과 대립하며 이와미, 빈고, 아키 지역으로 세력을 넓혔고, 셋째 아들 엔야 오키히사의 반란을 진압한 후 가독을 적손 아마고 아키히사에게 물려주었다. 모략에 능하고 가신을 아끼는 인물로 평가받았으며, 말년에는 오우치 가문과의 전투에서 패배하여 갓산토다 성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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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고 쓰네히사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아마고 쓰네히사 초상 (도코지조 소장)
아마고 쓰네히사 초상 (도코지 절 소장)
이름아마고 쓰네히사
원어 이름尼子 経久 (아마고 쓰네히사)
아명마타시로
별칭11주 태수, 귀신, 운슈의 늑대, 모략의 성인
시호흥국원전월수성심대거사
묘소동광사 (시마네현야스기시)
경구사 (돗토리현사이하쿠군호키정)
영창사 (시마네현하마다시카나기정)
가문아마고 씨
생애
출생1458년 12월 25일
사망1541년 11월 30일 (82세)
출생지이즈모 국
사망지불명
가족
아버지아마고 기요사다
어머니마키 아키치카의 딸
배우자길카와 부인 (길카와 쓰네모토의 딸)
자녀아마고 마사히사
아마고 구니히사
시오야 오키히사
이토 (기타지마 씨 부인)
딸 (센게 씨 부인)
딸 (아나도 히사요시 부인)
지쿠도 리겐 대화상
경력
주군교고쿠 마사쓰네 → 오우치 요시오키
관위민부소보, 이요노카미
직위무로마치 막부 이즈모 슈고다이
활동 시기센고쿠 시대
소속아마고 씨
군사
참전 전투고리야마성 공방전 (1540–1541)

2. 생애

조로쿠(長禄) 2년 11월 20일, 이즈모국(出雲)에서 이즈모 슈고다이(守護代) 아마고 기요사다(尼子清定)의 아들로 태어났다.[2] 아마고 씨는 우다 겐지(미나모토) 사사키 씨에서 갈라진 교고쿠 씨의 분가로, 쓰네히사의 할아버지 아마고 모치히사가 본가 당주이자 주군인 교고쿠 다카노리에게 이즈모 슈고다이 직을 임명받은 뒤로 이를 세습하였다. 어렸을 때 이름은 마타시로(又四郎)였다.[2]

분메이(文明) 6년, 이즈모와 히다오키오미 슈고(守護)를 맡고 있던 주군 교고쿠 마사쓰네(京極政経)의 교토 저택에 인질로 보내져 5년 동안 교토에 머물렀고, 원복(元服) 역시 교토에서 하여 마사쓰네의 이름 한 글자를 받아 '''쓰네'''히사('''경'''久)라는 이름을 쓰게 되었다. 분메이 10년까지 아버지에게서 가독을 물려받았다.

교토에서 인질 생활을 마친 쓰네히사는 분메이 10년까지 아버지에게서 가독 상속을 사양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교고쿠 씨 측 입장이었지만, 점차 고쿠진(국인)들과 결속을 강화하며 무로마치 막부의 명령을 무시했다. 마사쓰네의 사찰령을 압류하고, 미호노세키 공용전(公用銭)에 쓸 단전(段銭) 징수를 거부하는 등 독자적인 권력 기반을 쌓았다.[6] 그러나 이러한 권력 기반 확대 과정에서 서부 이즈모의 엔야 씨(塩冶氏)와 대립하는 등 권력 확대에는 한계가 있었다.[6]

이러한 행동은 결국 막부, 슈고, 고쿠진들에게도 반발을 샀다. 분메이 16년 아마고 씨의 거성이 포위당하는 사태가 벌어져 슈고다이 직을 박탈당하고 이즈모에서 쫓겨났다고 후세의 군기물(軍記物)에서는 언급하고 있다.[6] 그러나 슈고다이 직에서 쫓겨났을 뿐 이즈모에 그대로 머무르며 일정한 권력을 보유했던 것으로 보기도 한다. 실제로 조쿄 (센고쿠 시대) 2년 이즈모 고쿠진 미사와 씨를 공격해 항복시키는 등 그 권력이 쇠퇴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6]

1537년(덴분 6년) 쓰네히사는 가독을 적손 아키히사에게 넘겨주었다. 그 해에 오우치 씨 소유의 이와미 은광을 빼앗았다.[5]

1541년(덴분 10년) 11월 13일, 갓산토다 성에서 사망하였다. 향년 84세(만 82세)였다.[5]

2. 1. 소년기

조로쿠(長禄) 2년 11월 20일, 이즈모국(出雲)에서 이즈모의 슈고다이(守護代)였던 아마고 기요사다(尼子清定)의 적남으로 태어났다.[2] 아마고 씨는 우다 겐지(미나모토) 사사키 씨에서 갈라진 교고쿠 씨의 분가로, 아마고 쓰네히사의 조부인 아마고 모치히사가 본가 당주이자 주군인 교고쿠 다카노리로부터 이즈모 슈고다이 직을 임명받은 뒤로 이를 세습하였다. 어렸을 때의 이름은 마타시로(又四郎)였다.[2]

분메이(文明) 6년, 인질로써 이즈모와 히다오키오미의 슈고(守護)를 맡고 있던 주군 교고쿠 마사쓰네(京極政経)의 교토 저택으로 보내져 5년 동안 교토에 머물렀고, 원복(元服) 역시 교토에서 행하여 마사쓰네의 이름 한 글자를 받고 '''쓰네'''히사('''経'''久)라는 이름을 쓰게 되었다. 분메이 10년까지 아버지로부터 가독을 물려받았다.

2. 2. 가독 상속과 초기 활동

교토에서 인질 생활을 마친 쓰네히사는 분메이 10년(1478년)까지 아버지로부터 가독 상속을 사양하고 있었다.

당초에는 교고쿠 씨 측의 입장이었지만, 점차 고쿠진(국인)들과 결속을 강화하며 무로마치 막부의 명령을 무시했다. 마사쓰네의 사찰령을 압류하고, 미호노세키 공용전(公用銭)에 쓸 단전(段銭) 징수를 거부하는 등 독자적인 권력 기반을 쌓았다.[6] 그러나 이러한 권력 기반 확대 과정에서 서부 이즈모의 엔야 씨(塩冶氏)와 대립하는 등 권력 확대에는 한계가 있었다.[6]

이러한 행동은 결국 막부, 슈고, 고쿠진들에게도 반발을 샀다. 분메이 16년(1484년) 아마고 씨의 거성이 포위당하는 사태가 벌어져 슈고다이직을 박탈당하고 이즈모에서 쫓겨났다고 후세의 군기물(軍記物)에서는 언급하고 있다.[6] 그러나 슈고다이직에서 쫓겨났을 뿐 이즈모에 그대로 머무르며 일정한 권력을 보유했던 것으로 보기도 한다. 실제로 조쿄 2년(1488년) 이즈모의 고쿠진 미사와 씨를 공격해 항복시키는 등 그 권력이 쇠퇴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6]

슈고다이 지위를 되찾고 완전 복권을 달성하는 것은 메이오 9년(1500년)의 일이다. 오미 국에서 일족 간 항쟁(교고쿠 소란)에 패해 낙향해 온 마사쓰네와의 관계를 수복하고, 마사쓰네 사후 이즈모 대사 조영 과정에서 쓰네히사는 신지 씨와의 혼인관계를 추진하고 대립 관계에 있던 엔야 씨를 압박하는 등 이즈모 통치자로서의 지위를 확립해 나갔다.[6] 마사쓰네는 손자 기치도지마루에게 가독을 넘겨주고 에이쇼 5년(1508년)에 사망했고, 쓰네히사는 기치도지마루의 후견인으로 지명되었으나, 기치도지마루는 얼마 안 가 행방불명되어 쓰네히사가 사실상 이즈모의 주인이 되었다.[6] 이후에도 쓰네히사에게 저항하는 이즈모 국내 세력이 있었으나, 쓰네히사가 이즈모를 완전히 장악하게 되는 것은 10년 후인 다이에이 연간이었다.[6]

2. 3. 세력 확대와 오우치 가문과의 대립

1511년(에이쇼 8년), 주고쿠 지방의 유력 다이묘였던 오우치 씨 당주 오우치 요시오키가 교토로 상경할 때 쓰네히사도 동행했다. 이 시기 쓰네히사는 교토에서 벌어진 후네오카 산 전투에 참전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자세한 내용은 전해지지 않는다.

1512년(에이쇼 9년), 쓰네히사는 빈고국의 고쿠진이자 오바야마 성 성주였던 고시 다메노부가 오우치 씨에 대항해 일으킨 반란을 지원했다. 이 무렵 쓰네히사는 둘째 아들 구니히사는 호소카와 다다쿠니에게서, 셋째 아들 엔야 오키히사는 오우치 요시오키에게서 각각 이름 한 글자씩을 받아, 이들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1513년(에이쇼 10년), 쓰네히사는 동생 쓰네유키에게 호키국의 난조 무네카쓰를 공격하도록 명령하는 한편, 장남 마사히사를 아마고 씨에 반기를 든 사쿠라이 뉴도 소세키가 농성하던 아요 성으로 보냈다. 그러나 마사히사는 진군 도중 화살에 맞아 전사했다.[7]

1517년(에이쇼 14년), 쓰네히사는 오우치 요시오키의 이와미국 슈고 취임에 이의를 제기한 이전 이와미 슈고 야마나 씨와 연합하여 이와미 국내 오우치 세력의 성들을 공격했다. 그러나 당시 오우치 씨와의 전투는 소규모 충돌에 그쳤으며, 1518년에 본국인 스오국으로 돌아간 오우치 요시오키가 교토에 머무르고 있을 때부터 쓰네히사가 오우치 영지를 침범했다는 견해는 정확하지 않다.[6]

같은 해, 쓰네히사는 빗추국 북부의 신미 씨와도 연합하여 미무라 씨를 공격했다.

1520년(에이쇼 17년), 쓰네히사는 이즈모 서부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했다. 그러나 빈고국의 야마우치 씨, 아키국의 시시도 씨 등 국경을 접한 고쿠진 영주들과 대립하게 되었고, 특히 야마우치 씨의 이즈모에 대한 영향력은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따라서 빈고와 아키로의 진출은 이즈모 국내 지배를 안정시키기 위해서도 필수적이었으며, 이는 해당 지역에 이해관계를 가진 오우치 씨와의 군사적 충돌을 의미했다.[6]

1521년(다이에이 원년) 이후, 아마고 씨는 이와미로도 침입했다. 아키로도 진출을 시도하여 1523년(다이에이 3년)에는 중신 가메이 히데쓰나를 통해 가신으로 있던 아키 고쿠진 모리 씨에게 오우치 씨의 아키 경영 거점인 가가미 산성을 공격하게 했다. 모토나리는 책략을 써서 가가미 성주 구라타 후사노부의 숙부였던 구라타 나오노부를 꾀어 성주를 배반하게 하였고, 후사노부는 할복하고 가가미 산성은 함락되었다.[8] 훗날 나오노부 역시 살해되었다(가가미 산성 전투).

1524년(다이에이 4년), 쓰네히사는 군사를 이끌고 호키 서부를 침공하여 난조 무네카쓰를 격파하고 슈고 야마나 스미유키를 패퇴시켰다. 패배한 호키 고쿠진 대부분은 인바국, 단바국으로 도주했는데, 난조 무네카쓰도 단바 야마나 씨에게 의지했다(다이에이 5월 패배).

그러나 같은 해, 아마고 편이었던 아키 다케다 씨·도모다 씨가 오우치 씨에게 패배하고, 모리 모토나리도 이복 동생이던 아이오 모토쓰나와의 내분을 겪은 후 1525년(다이에이 5년)에 아마고 씨와의 관계를 끊고 오우치 씨에게 소속을 바꾸었다. 이로써 아마고 씨에게 기울어져 있던 아키 국내의 세력 균형이 흔들리게 되었다. 모리 씨의 이반은 모리 씨의 후계 다툼에 가메이 히데쓰나가 개입한 것이 큰 원인이었는데, 히데쓰나의 개입은 사실 쓰네히사의 강한 의향이 작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1526년(다이에이 6년), 호키·빈고의 슈고직을 맡게 된 야마나 씨가 반(反)아마고 세력임을 분명히 하고, 오우치·야마나 씨에게 포위된 형세가 되자 이듬해 1527년(다이에이 7년) 쓰네히사는 직접 빈고로 출병했으나 호소자와 산에서 오우치 씨의 중신 스에 오키후사에게 패배하여 퇴각했다. 이를 계기로 아마고 편이던 빈고 고쿠진 대부분이 오우치 씨에게 돌아섰다.

2. 4. 엔야 오키히사의 난

교로쿠 3년(1530년), 쓰네히사의 셋째 아들인 엔야 오키히사가 반(反)아마고파임을 선언하면서 내분이 발발하였다. 이즈모 대사, 가쿠엔지 등의 이즈모 국내 지샤 세력과 미사와 씨, 다카 씨 등 여러 세력이 오키히사의 아군으로 가담한 대규모 반란이었다. 또한 같은 시기에 오키히사는 오우치 씨의 지원을 요청하기도 하였다. 쓰네히사도 비슷한 시기에 오우치에 글을 보냈다고 한다. 소극적인 반응이었던 오우치 씨는 쓰네히사를 지원하겠다는 입장을 밝혔고, 당시 오우치 씨의 가신이었던 스에 오키후사가 교토쿠 3년 5월 28일에 쓴 편지에는 오키히사가 아버지 쓰네히사와 정면으로 대립하면서 몇 차례나 쓰네히사의 공격을 격퇴하였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하지만 오우치는 양자의 지원요청 가운데 최종적으로는 쓰네히사측을 지원함으로써 아마고와 화목하는 쪽을 택했다.[1]

반란은 덴분 3년(1534년)에야 진압되었고, 오키히사는 빈고 야마우치 씨의 고타치 성으로 달아났지만 죽은 형 마사히사의 아들인 조카 아키히사의 공격 등으로 자결하였다. 오키히사의 수급을 확인하기 위해 소금에 절인 오키히사의 수급이 아마고에 전해졌는데, 오키히사의 옛 영지는 쓰네히사의 둘째 아들이었던 구니히사가 갖게 되었다.[1]

2. 5. 가독 양도와 말년

1537년(덴분 6년) 쓰네히사는 가독을 적손 아키히사에게 넘겨주었다. 그 해에 오우치 씨 소유의 이와미 은광을 빼앗았다.[5]

오토모와 오우치 사이의 다툼이 이어지는 가운데 아마고는 동부로 차츰 세력을 넓혀 나갔고, 하리마의 슈고 아카마쓰 마사스케와의 전투에서 크게 승리하여 마사스케는 일시 아와지국으로 달아나기도 했다. 이듬해인 1539년(덴분 8년) 벳쇼 씨가 농성하고 있던 미키 성이 아마고 편으로 돌아서면서 마사스케는 다시 사카이로 달아났다. 이를 계기로 아키히사는 교토로 상경할 계획도 세웠지만, 오토모가 오우치와 화친하고 아마고 씨와의 화친을 파기, 이와미 은광을 빼앗겼다. 그 해 오우치 씨는 아키에서 아마고 세력으로 아마고의 원병을 받고 있던 아키의 아마고 세력인 다케다 씨의 거성 사토카나야마 성을 함락시키고, 당주 다케다 노부자네는 일시 와카사국으로 달아났다. 때문에 아키히사는 이즈모로 철수해야 했다.[5]

이로 인해 아마고와 오우치의 화친은 완전히 파탄났고, 1540년(덴분 9년) 오우치와의 조기 결전을 목표로 오우치 세력 아래 있던 아키 고쿠진 모리 씨의 토벌에 나섰다(이는 오우치에 의해 쫓겨난 다케다 노부자네의 요청도 있었다). 주변 형세는 아마고에 유리했고, 여러 구니로부터 원병도 늘어나서 3만 기(騎)로 늘어났다. 이 대군을 거느리고 요시다 고리 산성을 포위, 오우치와 결전을 대비하였으나, 이듬해 이쓰쿠시마 신사에 전승 기원을 마치고 출정한 스에 다카후사가 이끄는 오우치의 원병 2만 기와의 결전 끝에 패배했고, 아마고 씨는 아키에서의 기반을 잃고 말았다(요시다 고리 산성 전투).[5]

1541년(덴분 10년) 11월 13일, 아마고 쓰네히사는 갓산토다 성에서 서거하였다. 향년 84세(만 82세)였다.[5]

3. 인물·일화

쓰네히사는 계략뿐만 아니라 다방면으로 우수하여 문무양도를 겸비했다고 한다. 만년에 그린 자화상이 남아 있다.

계략가로서는 냉철하였으나, 한편으로 가신에게 굉장히 신경을 쓰는 자상한 인물이었다. 쓰네히사의 인품을 보여주는 일화는 다음과 같다. 가신이 쓰네히사가 가진 물건을 칭찬하면 굉장히 기뻐하며 아무리 비싼 물건이라도 금세 가신에게 주어버렸기 때문에 가신들은 이를 황송하게 여겨 쓰네히사의 물건은 칭찬하지 않고 단지 바라보기만 하기로 했다. 그 뒤, 어떤 가신이 정원에 있는 소나무라면 칭찬해도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소나무의 가지 모양이 훌륭하다고 칭찬하였는데, 쓰네히사는 그 소나무를 파내어 그 가신에게 주려고 했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이 당황하여 제지했으나, 쓰네히사는 포기하지 않고 기어코 소나무를 베어내어 주었다. 세인들은 아까운 일이라고 수군댔지만, 쓰네히사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또한 어떤 겨울에는 입고 있던 옷을 벗어서 가신에게 주었기 때문에, 얇은 면으로 된 소매 한 장으로 버텼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러한 일화는 센고쿠 무장으로서는 유례가 없는 것이므로, 의외로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한편으로 관점을 바꿔보면, 당시의 아마고 가문은 은상과 물건으로 가신과의 관계를 굳히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기반이 약했었다고 볼 수도 있다.

쓰네히사는 오우치 요시오키와 싸워, 아마고 씨의 영지를 넓혀 전성 시대(실제 전성기는 그의 적손인 아마고 하루히사 대)를 만들었기 때문에, "모략의 성", "모략의 명장"으로 칭해졌다. 모리 모토나리우키타 나오이에와 함께 모략의 천재라고도 불리며, 쓰네히사, 모토나리, 나오이에는 '중국 3대 모략가'로도 불린다.

구두쇠라고 할 정도로 검약가여서, 가신이 오이 껍질을 두껍게 써는 것을 싫어하여, 스스로 얇게 썰었다.

4. 정책

아마고 쓰네히사는 혼간지의 쇼뇨(証如)와 손을 잡았다.[1] 적손 하루히사 대에도 혼간지와 연락을 취하고 있어서 혼간지 측의 일기에 아마고 가문의 이름이 자주 등장한다.[1]

쓰네히사 휘하의 고쿠진(国人)은 직속 가신이라고 할 수 없어, 아마고 가문의 지배는 매우 불안정했다. 쓰네히사는 대외 원정이라는 명확한 목표를 제시하고 이에 따르게 함으로써 고쿠진들을 통제하려고 노력했다. 이러한 경우는 센고쿠 다이묘들에게는 드물지 않은 것으로, 가장 유명한 예가 다케다 신겐이 이끄는 다케다 가문이다.[1]

쓰네히사 때 이즈모 국내에서 아마고 가문의 영향력이 크지 않았기 때문에 삼남 오키히사를 엔야 가문에 양자로 보냈으나, 이것이 도리어 화근이 되어 친자식의 반란이라는 실책을 불러왔다.[2]

11개 구니의 태수라고 불리기는 하나, 실질적인 지배 지역은 이즈모·호키국·이키국 정도로 타 지역은 유동적인 상황이었다. 아마고 가문의 기반은 주로 산인 지방이며, 그 세력권도 형식적인 주종관계가 포함되어 있어 굳건하지 못했다. 주고쿠 지방에는 오우치 가문의 존재가 커서, 결국 오우치 가문의 침공으로 고생하게 되고, 오키히사의 난으로 가문이 엉망이 되었다.[3],[5]

쓰네히사가 거점으로 삼았던 이즈모는 메이토쿠의 난 이후 교고쿠 씨가 슈고다이를 파견하여 관리했지만, 하부 조직은 존재하지 않고 슈고다이만 파견되는 통치가 이루어졌다. 이즈모는 다른 국가와는 다른 통치 기구와 지배 기구(이즈모노쿠니노미야츠코 세력·사찰 세력·재지 구니진·타타라 제철소 등)로 이루어져 있었다. 쓰네히사는 국조 세력인 센케 씨, 기타지마 씨, 구니진 세력으로서 가장 권력이 있던 시지미 씨, 엔야 씨와의 혼인 정책을 추진하여 이들을 아마고 씨의 하부 조직으로 체제화하려 했다.[6]

쓰네히사는 혼인 정책을 펼쳐 고쿠진 등과 인척 관계를 맺어 아마고 가문의 세력 확대를 꾀했다. 이는 주고쿠 지방의 대 다이묘로서 전성기를 맞이하는데 공헌하였다. 그러나 쓰네히사는 일족과 일문의 불화를 조정하는 데 실패하였고, 인척 관계가 차기 당주 하루히사와 친족·고쿠진과의 알력이 생기는 원인이 되어 가문 내의 내분이 일어나는 등, 많은 난제를 남기고 세상을 뜨게 된다.[1]

하루히사가 제1차 갓산토다성 전투 이후 이즈모에서 퇴전·추방된 자들 중에는 아마고 기요히사, 다가 씨, 센게 씨, 시지미 씨, 사와 씨가 있는데, 이들은 아마고 씨와 혼인·친척 관계를 맺은 일족이었다. 이들은 경구 시대의 방침에 따라 혼인 관계가 진척된 경우가 많았다. 시오야 오키히사의 난 때도 한 번 이들의 처분을 받은 자들은 시오야 측에 가담했다. 경구는 시오야 오키히사의 건을 밟아 하루히사의 정실로 아마고 구니히사의 딸을 시집보내 친족 간의 불화를 없애려 했다. 그러나 이 아내의 죽음으로 구니히사와의 유대를 끊고 하루히사는 신구당 숙청이라는 수단으로 나아가게 했다.[1]

4. 1. 외교

쓰네히사는 혼간지의 쇼뇨(証如)와 손을 잡았다.[1] 적손 하루히사 대에도 혼간지와 연락을 취하고 있어서 혼간지 측의 일기에 아마고 가문의 이름이 자주 등장한다.[1]

4. 2. 내정

쓰네히사 휘하의 고쿠진(国人)은 직속 가신이라고 할 수 없어, 아마고 가문의 지배는 매우 불안정했다. 쓰네히사는 대외 원정이라는 명확한 목표를 제시하고 이에 따르게 함으로써 고쿠진들을 통제하려고 노력하며 아마고 가문을 운영했다. 이러한 경우는 센고쿠 다이묘들에게는 드물지 않은 것으로, 가장 유명한 예가 다케다 신겐이 이끄는 다케다 가문이다.[1]

쓰네히사 때 이즈모 국내에서 아마고 가문의 영향력이 크지 않았기 때문에 이를 해결하고자 삼남 오키히사를 엔야 가문에 양자로 보냈으나, 이것이 도리어 화근이 되어 친자식의 반란이라는 실책을 불러왔다.[2]

11개 구니의 태수라고 불리기는 하나, 실질적으로 지배 하에 두었던 지역은 이즈모·호키국·이키국 정도로 타 지역은 유동적인 상황이었다. 실제로 아마고 가문의 기반은 주로 산인 지방이며, 그 세력권도 형식적인 주종관계가 포함되어 있어 굳건하지 못했다. 게다가, 주고쿠 지방에는 오랜 기간 동안 기반을 굳히고 있던 오우치 가문의 존재가 커서, 결국 오우치 가문의 침공으로 고생하게 되고, 오키히사의 난으로 가문이 엉망이 되었던 것도 사실이다.[3],[5]

쓰네히사가 거점으로 삼았던 이즈모는 메이토쿠의 난 이후 교고쿠 씨가 슈고다이를 파견하여 관리했지만, 하부 조직은 존재하지 않고 슈고다이만 파견되는 통치가 대대로 이루어졌다. 이즈모는 그 역사로부터 다른 국가와는 다른 통치 기구와 지배 기구(이즈모노쿠니노미야츠코 세력·사찰 세력·재지 구니진·타타라 제철소 등)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 때문에 쓰네히사는 국조 세력인 센케 씨, 기타지마 씨, 구니진 세력으로서 가장 권력이 있던 시지미 씨, 엔야 씨와의 혼인 정책을 추진하여 이들을 아마고 씨의 하부 조직으로 체제화하려 했다.[6]

4. 3. 아마고 가문 내의 갈등

쓰네히사는 적극적으로 혼인 정책을 펼쳐, 고쿠진 등과 인척 관계를 맺어 아마고 가문의 세력 확대를 꾀했다. 이러한 정책은 아마고 가문의 세력 확대에 공헌하여 적손 하루히사 대에 아마고 가문은 주고쿠 지방의 대 다이묘로서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그러나 쓰네히사는 일족과 일문의 불화를 조정하는 데 실패하였고, 더욱이 이 인척 관계가 차기 당주 하루히사와 친족·고쿠진과의 알력이 생기는 원인이 되어 가문 내의 내분이 일어나는 등, 최후에는 많은 난제를 남기고 세상을 뜨게 된다.[1]

하루히사가 제1차 갓산토다성 전투 이후 이즈모에서 퇴전·추방된 자들 중에는 아마고 기요히사, 다가 씨, 센게 씨, 시지미 씨, 사와 씨가 있는데, 이들은 아마고 씨와 혼인·친척 관계를 맺은 일족이었다. 이들은 경구 시대의 방침에 따라 혼인 관계가 진척된 경우가 많았다. 게다가 시오야 오키히사의 난 때도 한 번 이들의 처분을 받은 자들은 시오야 측에 가담했다. 또한 경구는 시오야 오키히사의 건을 밟아 하루히사의 정실로 아마고 구니히사의 딸을 시집보내 친족 간의 불화를 없애려 했다. 그러나 이 아내의 죽음으로 구니히사와의 유대를 끊고 하루히사는 신구당 숙청이라는 수단으로 나아가게 했다.[1]

5. 관련 작품


  • 우에다 아키나리의 소설 《국화의 약속》에서는 주인공 아카나 소에몬의 원수로 등장한다. 의심 많고 냉혹하지만, 신의를 존중하는 인물로 묘사된다.[1]
  • 라프카디오 헌은 《일본 잡록》에서 《지켜진 약속》이라는 제목으로 위 소설을 번안했는데, 여기서도 아카나 소에몬의 원수로 등장한다.[1]
  • 나카무라 세이시로의 소설 《아메고 쓰네히사 - 모리가 도전한 중국의 영웅》 (PHP 연구소)
  • 진카와 다케토시의 소설 《용의 꿈 아메고 쓰네히사》
  • 요네하라 마사요시의 소설 《풍운의 갓산 성》
  • 다케우치 료의 소설

:* 《모략의 성자 아메고 쓰네히사전 청운의 장》

:* 《모략의 성자 아메고 쓰네히사전 풍운의 장》

:* 《모략의 성자 아메고 쓰네히사전 서운의 장》

:* 《모략의 성자 아메고 쓰네히사전 뇌운의 장》

참조

[1] 웹사이트 朝日日本歴史人物事典「尼子経久」の解説 https://kotobank.jp/[...] kotobank 2021-10-22
[2] 서적 コンサイス日本人名辞典 第5版 株式会社三省堂 2009
[3] 간행물 大日本史料
[4] 간행물 大日本史料
[5] 논문 1984
[6] 논문 2014
[7] 간행물 大日本史料
[8] 간행물 大日本史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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